번제
W 호재
번제(燔祭): 제물을 가죽만 빼고 모조리 불에 태워 그 향기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제사.
제물을 바치는 건 어느덧 예삿일이 됐다. 끈끈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뼛가죽을 벗겨내는 행위가 차츰 익숙해졌다. 제 안위가 위험해질 때마다, 하이타니가 곤란해질 때마다, 번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쓸데없이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유야 언제나 간단했다. 인간도 결국 유약한 동물에 불과하니, 원초적인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고 이노우에는 늘 생각해 왔다. 추잡한 본능에 휘둘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저질러 놓고 회개했다. 그러면 반성이 아주 잘 됐다. 마음속에 있는 말 없는 말 구분하지 않고 입에서 목소리가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인데 제아무리 신인들 뭘 어찌할 수가 있겠는가. 한 마디로 깡패 심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을 믿기 시작했지?
다분히 중의적인 의문이 이노우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은 없다. 하지만 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믿지 않은 게 되는가.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헛된 믿음이라도 가져야 사는 법이니까. 인간이니까 가질 법한 더러운 본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경지에 다다르자 이노우에는 결론 없이도 확고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젊은 여자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었다. 투박한 도끼날이 머리에 박혔고, 끙끙대며 쇠붙이를 다시 빼낼 때는 단단한 머리뼈가 쪼개지는 소리가 났다. 찐득하고 물기 어린 게, 썩 유쾌하지 않은 소리였다. 이노우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운털이 한 번 박히니 사소한 것까지 아니꼽게 다가왔다. 그래도 역시 죽이길 잘했어. 살아 있게 놔두는 건 산소 낭비야. 지구 온난화에 무지막지하게 기여하는 거라고. 나는 착한 여자애니까 이런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응, 그런 셈이지. 이노우에는 생각했다.
도끼질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경험으로 다져진 실력 덕분이었다. 이노우에는 죽은 여자의 몸에 소독용 에탄올을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끈적이는 피로 칠갑이 된 머리 위에서 성냥을 켰다. 곧 여자의 몸이 타기 시작했다. 연기가 많이 나는 통에 한 발짝 물러나 자리를 피해야 했다. 매연에서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났다. 그래도 한 번도 들키진 않았다. 여기는 폐건물 안이니까. 수 년째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니까.
마녀.
그래서 하이타니는 이노우에를 마녀라고 불렀다. 평범한 여자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 큼지막하고 해괴한 행동들이 하이타니의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의도한 바와는 정반대였지만, 모로 가도 목적지만 가면 된다고, 이노우에의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들키고 싶지는 않아 했다. 유약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하이타니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 척으로 일관할 뿐이었지만.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의 소매 끝을 더듬었다.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이타니가 은근슬쩍 이노우에의 손아귀를 풀어냈다. 이노우에의 손가락에 자연스레 힘이 풀렸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스로 하이타니의 수족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었으니까.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 테지만, 때로는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절절하게 호소하기도 할 테니까. 손발처럼 움직이는 주제에 자아가 있었다. 어느덧 그걸 당연한 듯이 여기게 됐다.
나 좀 봐줘.
나만 봐줘. 기껏해야 한 글자만 다른 말을 이노우에는 속으로 눌러 삼켰다. 뒤틀린 애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으면 지금껏 많은 것을 숨기며 살지도 않았겠지. 훨씬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자가 되었을 거다. 사랑을 쟁취하는 여자가 되었을 거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는 여자가 되었을 거다.
보다 못한 하이타니가 이노우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경멸과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이노우에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 하이타니 씨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 나는 언제나 하이타니 씨를 위해 움직여.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하이타니 씨 때문이야.
뭐야?
기가 찼다. 움직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이는 게 꼭 저주 인형 같다고 하이타니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노우에의 눈에 곧바로 눈물이 고였다. 설산에서의 안절부절못하던 진짜 표정은 어디 가고, 조악한 연기만이 남았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투박하게 드러났다. 하이타니가 이노우에의 본심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많은 경험으로 다져진 눈치였다.
별개로 행실을 사릴 필요는 없다고 하이타니는 확신했다. 어쨌거나 살인자에 불과하니까. 번제니 뭐니 법 앞에서는 하등 소용이 없는 처사였다. 21세기에 무슨 제사 의식이야. 마녀사냥도 인터넷으로 하는 시대다. 그런데 굳이 전통을 고수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이타니가 콧방귀를 가볍게 뀌고 이노우에에게 반박했다.
네가 한 건 살인이야.
발끈한 이노우에가 말대꾸했다.
사랑이야.
하이타니가 차갑게 대답했다.
살인이야.
나를 위한 게 아니라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있잖아. 욕설을 마구잡이로 내뱉고 싶은 걸 자정하고 자정해서 최대한 간결하게 말했다. 이노우에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 또 이상한 곳으로 튀면 정말로 곤란해지니까. 하이타니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말싸움은 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이타니가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저리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노우에는 수신호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그때 왜 모른 척한 거야? 하이타니 씨는 이미 내 공범이야. 내가 자수하면 하이타니 씨도 끝나. 나란히 수갑을 찬 다음에 그 설산에 가서 상황을 재현할 거라고. 우리 운명은 하나로 묶여 있어.
어, 해봐. 자수해 봐. 한 번 갔다 온 거 두 번은 못 갈 것 같아?
하이타니 씨.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의 이름을 부르며 호소했다. 하이타니는 이노우에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쭈그려 앉아 덜 탄 시체를 확인했다. 잿더미가 되다 만 살점이 불투명하고 거무스름했다. 피자 가게의 샐러드 바에 있는, 싸구려 대용량 젤리 같았다. 마침내 하이타니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죽일 거면 잘 태우기나 하든지. 매번 죽은 살덩이나 확인하고 있는 제 신세가 처량했다. 울컥하는 감정이 뱃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예전에 이노우에에게 알려 준 적이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설산 안에서, 죽은 여자의 몸을 구덩이에 구겨 넣으면서. 켜켜이 쌓인 눈 때문에 알아서 방음이 됐다. 곤란해지지 않게 알아서 처신을 잘하고 다니라는 뜻이었다. 목을 조르면 반드시 설골이 부러지므로 타살인 게 들통나 버리니까, 반드시 코와 입을 막아서 질식시킬 것. 그다음 시신을 완전히 불태우고, 타고 남은 뼈는 어디에도 묻지 말고 곱게 가루 내 바람에 날려 보낼 것. 살인이 아니라 실종으로 끝내라는 저의였다.
사람의 온몸을 묶어서 처리하기 직전까지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이노우에의 성향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몸 이곳저곳에 난 상처 때문에 어차피 자살 위장은 물 건너간 셈이지만. 그렇지만 걷고 뛰면서 배운 노하우를 가르쳐 주면 조금 더 영악하게 대해도 될 것 같았다. 언젠가 콱 죽여 버려도 죄책감이 조금은 덜하도록. 하이타니도 결국 사람이니까. 미운 정에 휘둘리는 셈이었다.
하이타니가 젊은 여자였던 것을 발로 쓱 밀어 치웠다. 수분이 바짝 말라붙은 덩어리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힘없이 굴렀다. 살점 속 군데군데 검은 뼈가 드러나 있었다. 그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라 는 것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다지만. 말 한마디, 단어 하나까지, 사소한 것조차 잊지 않고 하이타니가 지시한 그대로 살인을 행하고 있었다니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또다시 엄습하는, 관찰당하는 것에 대한 이상한 기분.
가르쳐준 대로 코와 입을 막았다고 했다. 쿠션 따위가 아니라 직접, 두 손으로. 꽉 막힌 호흡을 느끼고 살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맨손으로. 무방비한 피부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시체를 불에 태웠으니 그녀가 생전에 묶였다는 것을 찾기는 어려울 거다. 목을 조르는 대신 호흡기를 막았으니 설골이 부러지지도 않았을 거고. 남은 건 두개골이나 다른 곳에 남은 타격의 흔적일진대, 뼈를 아예 갈아 버린다면 이것도 발견하지 못하겠지. 완벽한 미제사건이었다.
나를 항상 모른 척해 주는 이유가 뭐야? 몇 번이나 그래 주고 있잖아. 하이타니 씨.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
하이타니가 말을 아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대단한 여자라 한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으니까. 이곳에서 실종되는 여자들은 쌔고 쌨으니까. 그중 하나로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될 텐데. 자꾸만 망설이게 됐다. 귀찮음이 가장 컸다. 귀찮음을 빙자해 살려 두는 셈이다. 물러 터진 새끼. 하이타니가 속으로 스스로를 지칭했다.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에게 주머니칼을 휘두른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하이타니가 고개를 뒤로 꺾어 이노우에의 칼을 가볍게 피했다. 스텝을 여러 번 밟아 공중을 가르는 날붙이를 전부 피하고, 순식간에 이노우에의 뒤로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광경이었다. 살아서 갖지 못할 바에 죽어서 가지겠다는 건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하이타니의 머릿속에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노우에가 계속해서 칼을 휘둘렀다. 적중하든 빗나가든 간에.
애초에 정말로 맞으라고 칼을 쓴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하이타니가 아파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칼에 찔린다고 해도 나쁠 건 없지. 하이타니 씨가 나만 보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맘대로. 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이노우에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독점욕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 같았다. 이노우에가 날카로운 쇠 날을 계속 휘둘렀다.
미쳤어?
하이타니가 고개를 숙이면서 소리쳤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노우에의 안광이 번쩍였다. 눈이 반쯤 돌아 있었다. 하이타니가 칼을 쥐고 있는 이노우에의 손목을 빠르게 쳤다. 꼭 쥐고 있던 손아귀가 무색하게 칼이 한 번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 벼린 날붙이가 폐건물 바닥에 닿으면서 챙그랑 소리가 났다. 행여나 날의 이가 나갈세라, 이노우에가 재빠르게 칼을 다시 집어 들었다. 하이타니가 손쓸 새도 없을 만큼.
거리가 멀어진 둘 사이에 잔뜩 가라앉은 기류가 흘렀다.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둘의 목덜미를 감쌌다. 이노우에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차게 식은 땀이 이마에 방울져 맺혔다. 당장이라도 육성으로 외치고 싶었다. 하이타니 씨는 내 거야. 애먼 여자한테 눈 돌리지 말란 말이야. 내가 다 없애 버릴 거야. 다 제물로 바쳐 버릴 거야.
하이타니가 짝다리를 짚고 왼손을 제 허리에 얹었다. 어디 올 테면 와 보라는 제스처였다. 참지 못한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에게 소리쳤다.
내가 한 게 왜 살인이야?
하이타니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놀랍다는 듯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살인이 아니야?
사람은 사랑으로 덮을 수 있어.
못 덮어.
덮을 수 있어.
아니, 절대 그렇게 못 해.
하이타니가 이노우에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아무리 받침 하나 차이라도 사람과 사랑은 달라. 사랑과 살인도 달라. 달라도 한참 달라. 똥 밭에서 구르고 있다고 해도 분별할 건 해야지. 개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려면 구분해야지. 하이타니가 답지 않게 목소리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한 발짝만 더 나가도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있는 속 없는 속을 다 끄집어낸 걸 단 몇 마디로 일축했다. 하고 싶었던 말에 비해 아주 짧은 길이였다.
이노우에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하이타니가 그 틈을 타서 오른손으로 이노우에의 손목을 세게 쥐고, 왼손으로 뺨을 때렸다. 이노우에의 고개가 왼쪽으로 홱 돌아갔다.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이노우에가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아직 멀쩡한 칼이 주인을 따라 바닥에 나뒹굴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입술이 빨갛게 터져 있었다.
이노우에가 아릿하게 몰려오는 쓰라림을 손으로 대충 닦아냈다. 고무줄이 터져 산발이 된 머리를 휙 들어 올리고, 치켜뜬 눈으로 하이타니를 똑똑히 바라봤다. 이노우에가 무언가 말하려고 했는데, 하이타니가 그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관계에 못을 박았다. 뽑으려야 뽑을 수가 없는 대못이었다.
미친년 같으니, 너는 살인을 한 거야.
실시간으로 번제의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둘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더 이상 어떤 조언도 해줄 수가 없었다. 이노우에의 처신은 이미 완벽했다. 어쩌면 현장에 있는 이들보다 치밀할지도. 시체를 불에 태울 때 이노우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문득 궁금해졌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조그마한 건수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을 믿기 시작했지? 다분히 중의적인 의문이 하이타니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은 없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신을 믿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믿지 않은 게 되는가.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헛된 믿음이라도 가져야 사는 법이니까. 인간이니까 가질 법한 더러운 본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노우에를 꿰뚫어 본 하이타니는 단 한 가지 선택만을 할 수 있었다.
하이타니가 몸을 돌려 폐건물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이노우에가 급하게 바닥을 기어 하이타니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처량하게 말끝을 흐렸다.
폐건물로 데리러 올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하이타니가 말없이 이노우에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잡히지 않은 다른 발로 손을 떼어낸 다음, 폐건물 밖으로 사라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자박자박 모래 밟히는 소리가 났다. 이노우에는 그걸 미동 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