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s love
W 호재
TV에 노이즈가 일었다. 어쨌거나 요즘엔 레트로가 유행이라고. 하이타니가 20세기에 유행했던 디자인의 스니커즈 앞코를 쓰다듬었다. 미세하게 빛이 바랜 듯한 흰 고무가 요철 없이 매끈했다. 하이타니의 옆에 있는 턴테이블이 착실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LP를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일부러 하이타니가 보는 앞에서 중얼거렸다. 어차피 신지도 않을 거면서 모셔 놓기는.
말 다 했냐? 죽여 버린다.
이노우에가 입을 한 번 삐죽이고, 용감하게 대꾸했다.
그래 줄래?
진짜 미친년 같은 게. 뜻밖의 동조에 하이타니가 당황한 구석을 보였다. 이노우에가 한껏 뿌듯하게 웃어 보였다.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곁눈질로 흘겨본 턴테이블이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테다. 오래전 이노우에 자신이 가져다준 아이템이 아니던가? 하이타니의 아지트에 무턱대고 들어왔던 날들 중 하루였다. 무엇 하나 흐트러짐 없어 보이는, 악독하기 짝이 없는 조직의 대가리가 쓸 법한 물건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니 매일같이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이노우에는 희미한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만 알고 있는 하이타니 린도의 사소한 부분이라니. 이러한 것이야말로 이노우에가 한평생 추구해 온 생의 일부분 같은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노우에의 입가에 반달 같은 미소가 저절로 걸렸다. 운동화처럼 빛이 바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아주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아니다. 그것보단 조금 뒤로. 그러니까 언제냐면, 정확히 ‘그 날’부터. 폐건물 구석마다 켜켜이 쌓인, 들큰한 모래 냄새가 아직도 생생했다. 심지어, 아직도 버리지 않은 편지들의 행방을 이노우에는 알고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종이 쪼가리에 먼지가 앉지 않게 매일 같이 살펴봤다. 비록 하이타니가 아지트 한구석에 처박아 둔 편지의 존재를 잊었다고 해도.
이노우에의 어깨에 전율이 돋았다. 바닥에 꿇어앉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멍을 때리다시피 하는 이노우에를 보다 못한 하이타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노우에의 팔뚝을 발끝으로 쿡 찔렀다. 손바닥에 살결을 밀착하기는 싫고 말은 걸고 싶은 자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정신 차려.
줄곧 이어지던 이노우에의 회상이 끊겨 버렸다. 정신을 차린 이노우에가 하이타니를 올려다봤다. 이노우에가 물건 하나를 가리키면서 행복에 젖은 목소리로 하이타니에게 물었다. 턴테이블을 말하는 거였다. 반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하이타니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 싫을 뿐.
저기, 있잖아. 하이타니 씨. 저 검은색 턴테이블. 내가 준 거 맞지? 혹시 그날, ······기억나?
하이타니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대답했다.
아니, 모르겠는데.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에 휩싸인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에게 열변을 토했다. 왜 있잖아. 하이타니 씨가 내 편지 가방을 받아줬던 날. 스산한 폐건물까지 나를 데리러 왔던 날. 그런 곳까지 나를 데리러 왔으면서 생사여부만 확인하고 나 버리고 갔던 날. 이후로도 꽤 정확한 설명이 이어졌다. 스스로 원하는 일―주로 하이타니에 관련된―에만 쓰이는 이노우에의 가공할 기억력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이타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말 한마디 없는데도 꽤 얄미운 처사였다.
이노우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쨌거나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하이타니가 제대로 된 의자를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싫으면 내 집에서 꺼지라는 식은 이제 익숙했다. 이노우에가 굴하지 않고 앳된 시절을 돌이켰다. 그다음은 바다에 갔을 때. 방파제 근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사람 두개골이 떠올랐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허겁지겁 비를 피하고 뭐에 홀린 것처럼 서로 애타는 키스를 나눴을 때. 이노우에가 손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하이타니에게 설명했다. 하이타니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노우에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이타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왼손을 잡아끌었다. 하이타니의 왼손 약지에는 잘 세공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노우에가 직접 끼워 준 거였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더니,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까지도 반지는 하이타니의 손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정말로 그랬다가는 훨씬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는 하이타니의 숱한 경험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절반은 포기였다. 나가떨어지려면 진작에 그랬어야 했으니까. 이런 저질 스토커 행위는 십 대에 졸업했어야지. 이대로라면 서른 줄에 접어들어도 계속될 기세였다. 아니, 스토킹에도 쓸데없는 관록이 쌓일 테니 오히려 심화될 것도 같았다. 이상한 곳으로 튀기 전에 비위를 맞춰 주는 편이 낫다고 하이타니는 생각했다.
나머지 절반은 신중함이었다. 이노우에의 뒷배가 상당히 만만찮았다. 평소 하던 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을 깔끔히 지워 버리려면 굉장히 많은 품이 들 터였다. 수십 배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고 수천 배로 완벽한 계획이 필요하겠지. 마음 내키는 대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할 판이었다. 무감하게 선을 긋기에는 너무 오래된 구면이 되어 버린 까닭이다.
어쩐지 구하기 힘든 레어템을 척척 가져오더라니. 하이타니가 미묘한 표정을 하고서 이노우에와 시선을 맞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깨끗하고 싱그러운 이노우에의 눈동자가 하이타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의 눈치를 빠르게 살폈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하이타니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줬다. 결심의 제스처였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는 거지? 내가 대신 죽여 줄까?
하이타니가 혀를 쯧, 하고 차며 신경질이 잔뜩 묻어나는 투로 반문했다.
자살이라도 하게?
이노우에가 풀죽은 얼굴로 두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러지 마아······. 나 아직도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상처받는다고.
하이타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쉬었다. 계집 하나에게 저당 잡힌 제 신세가 가끔은 구차해 보였다. 왼손뿐만 아니라 오른손 약지까지, 자물쇠처럼 채워져 있는 반지는 언제나 우스워 보였고. 심지어 이렇게 평생 몸부림칠 바에는 차라리 없는 마음이라도 줘 볼까, 생각한 적까지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 바에는 죽는 게 낫다고 정정하기는 했지만. 저런 징그러운 스토커에게 사랑을 속삭이느니 온몸에 휘발유를 붓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스토커를 한쪽에 끼고 살 수밖에 없는, 제 처지에 동정심이 들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익숙해질 참이었다.
하이타니가 무심하게 이노우에의 정수리를 마구 헤집어서 헝클어뜨렸다. 이렇게 하면 얼마간은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수년 동안 축적한 나름의 노하우였다. 예상대로 한창 바쁘던 이노우에의 입이 얌전해졌다. 대신 반짝이는 두 눈으로 하이타니를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이타니가 자연스럽게 이노우에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든 말든, 이노우에는 계속 하이타니를 쳐다봤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에게 짧고 굵은 물음을 던졌다.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았다.
어제 사람 몇 명 담갔어?
하이타니의 목뒤에 작은 소름이 돋았다. 은근한 당황의 여파로 눈썹을 치켜올리게 됐다. 이노우에는 하이타니가 보인 찰나의 변화를 간파한 건지, 줄곧 확신의 언어로 떠들어 댔다. 오산바시 부두 쪽에서. 따까리들끼리 마사지 한 번씩 시킨 거 다 알고 있어.
하이타니는 뭔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아무리 경력이 화려하다 해도, 한낱 계집애가 은어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 하이타니가 찝찝하다는 낯으로 이노우에에게 물었다.
그게 뭔지 알고 하는 소리야?
패싸움 말이야. 요 며칠 사이에 하이타니 씨가 혼잣말한 거 들었어. 이렇게 말하는 게 의미 전달에 더 좋지 않을까 해서······. 별로야? 하지 말까?
아. 하이타니가 빠르게 납득했다. 사소한 것조차 허락을 맡고 싶어 하는 이노우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차피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을 거면서. 단 한 번도 진실된 뜻대로 움직인 적도 없으면서. 하이타니가 기가 찬다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여전히 노이즈를 송출하고 있는 TV를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조잡한 화면이 종료되니 턴테이블의 소리만이 들리기 시작했다.
80년대 시티 팝이 하이타니만의 공간에 울려 퍼졌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이노우에가 구해다 줬던 LP였다. 음반을 꼴랑 하나만 내고 활동을 중단한 마이너 가수의 것. 매물이 워낙 없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물건을 목숨처럼 여긴 모양이지. 덕분에 지금까지 듣고 있으니 불만을 표출할 생각은 없었다. 스토커가 아니라 불시에 찾아오는 레어템 조달원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헛웃음을 지은 하이타니가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되려 놀아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야. 앞으로는 일반인인 것처럼 굴어.
이노우에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내가 일반인이 아니야?
하이타니가 짧게 반박했다.
사람을 죽였잖아.
그으거야, 그렇지. 맞아, 그렇지만. 그렇긴 하지만. 행적을 간파당한 이노우에가 말꼬리를 잔뜩 늘어뜨리면서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래도 뭔가 억울했는지, 이노우에가 두 주먹을 꼭 쥐고 하이타니에게 앙탈을 부렸다. 여전히 연약한 여자애인 척이 필요한 건지도.
하지만 걔는 내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야!
식상한 소리.
지금껏 만난 루저들 중 열에 여덟은 그렇게 말했다.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뻔한 변명이었다. 현장을 뛸 때마다 똑같은 발악을 하는 이들을 짓밟는 것이 하이타니의 일이었다. 다들 얼마나 똑같은지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퍽이나 그러시겠지. 무관심한 말 뒤에 날아오는 발길질이 잘 벼린 비수 같았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행태였다. 이노우에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열변을 토했다. 하이타니가 지금껏 손을 봐주지 않은 탓이다.
내가 아직도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거야?
그건······.
하이타니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답잖게 뜸을 들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혼란이 대뜸 찾아왔기 때문이다. 올곧은 감정만을 영위해 왔던 하이타니에게는 해석의 난도가 높았다. 에러가 뜬 컴퓨터처럼 뇌리에 착실하게 딜레이가 걸렸다. 꽤 생경한 감각이었다.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이타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늘 일삼는 행동이라도 이노우에와 함께 있으면 골의 깊이가 달라지곤 했으니까. 끊임없이 신경을 쓰게 된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어쨌거나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둘 모두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감정의 방향만이 달랐을 뿐이다. 하이타니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물쩍 넘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되도 않는 것을 확답하느니 차라리 묵언수행이 낫다고 생각했을 테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판단은 대부분 합리적으로 맞아떨어졌다. 이노우에가 더 캐묻지 않고 순순히 포기했다. 아직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한발 물러난 건 확실했다. 이 또한 나름의 노하우였다.
그 많은 세월 동안 편법만 늘었어. 하이타니는 몰래 표정을 굳히고 생각했다. 정공법은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닥돌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게 된 것에 가까웠고, 더 구차하게 말하자면 ‘당한 것’이지. 자존심이 팍 상해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검은 TV 화면이 황량했다. 매끈한 액정 너머로 하이타니와 이노우에의 모습이 비쳤다.
하이타니가 시선을 돌리니, 이노우에가 하나로 묶은 머리를 손질했다. 처음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습관이었다. 사랑스러운 여자라면 고운 머릿결을 가지는 게 당연하니까.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는 없다고 단정했다. 머리카락이 가진 힘이 꽤 크다고 줄곧 믿었다.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행동의 당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노우에가 머리카락에 세 번째로 손가락을 꽂았을 때, 하이타니가 못 봐 주겠다는 듯 이노우에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정신 사나우니 그만하라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거였다.
멍청해 보여.
이노우에는 단번에 알아듣고 손을 제 허리 뒤에 얌전히 갖다 놓았다. 똑같은 저의라도, 얌전한 숙녀 타입이 좋다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 주제도 모르고 망상을 해댔다. 늘 그랬듯이. 하이타니가 익숙한 듯 이노우에의 속마음을 꿰뚫어 봤다. 보고 싶지 않은데도 속속들이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하이타니는 이노우에에게 헛수고라는 말을 해 주려다가 도로 목소리를 삼켜 참았다. 대신 새로운 머리 끈을 건넸다. 얼마 전, 프락치 노릇을 하던 마담을 처단했을 때 실수로 들고 온 물건 같았다. 배신자의 유품인 셈이었다.
곧 이노우에의 두 눈이 토끼처럼 커졌고,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입술이 벌어졌다.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였다. 필요 없는 물건이니 버린 것에 가깝지만서도 흔한 경험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하이타니의 선물이라니! 도대체 얼마만의 성과인가. 장식장에 모셔다 둘 물건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이노우에가 말문이 막힌 채로 머리 끈을 받아들었다. 코와 뺨이 붉어져 있었고 양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쾌감이 몰려왔다. 드디어 인정받은 것 같았다.
역시 진심이 아닐 줄 알고 있었어. 누가 사랑하는 사람더러 자살하라고 한단 말이야? 느려졌던 이노우에의 사고회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자, 하이타니가 부러 허공을 보면서 턴테이블에 다가갔다. 트랙이 끝난 LP를 뺀 다음, 뒤집어서 다음 트랙을 재생했다.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한 시티 팝이었다. 하이타니는 LP를 뒤집으면서 몰래 생각했다.
만약 이 가수가 살아있었다면.
이노우에가 이 여자도 죽였을까?
설산에 묻힌 여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