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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 Violet Sugar
W 시다
1
희끄무레한 기관차 경적 소리가 플랫폼의 녹슨 연철 철로를 타고 번졌다. 증기 사이로 흰 눈발이 섞여 퀴퀴한 연기 냄새가 저며들었다. 새해를 넘기고 닷새가 채 지나지 않아 기차역이 고향에 내려가는 도시인들로 날마다 호황을 이루었다. 어미 아비의 손을 붙든 아이들, 젊은 남녀의 높고 낮은 웃음소리, 번잡한 발걸음…. 어깨의 붉은 완장을 고쳐 맨 하이타니는 입에 펜을 물고 나이 든 귀부인들의 기차표를 기계적으로 끊었다. 저녁 여덟 시에 출발하는 글래스코행 티켓의 절반을 돌려주며 그는 무상하게 바짓단에 쌓인 눈을 털었다. 잉글랜드 중부의 웨스트 미들랜즈에서는 유례 없는 폭설이 이틀째 지속되고 있었다. 폭죽놀이와 함께 시작된 '54년의 첫눈이 종아리를 덮고도 그칠 낌새를 비치지 않았다.
여인들의 키에 맞춰 기울이고 있던 시선을 정면으로 들어올리자 맞은편 벽을 빼곡히 메운 이름 모를 곡예사의 야간 공연 포스터와 아프리카로의 저돌적인 영토 확장을 독려하는 정부의 제국주의 프로파간다가 시야에 직선으로 겹겹이 들어와 박혔다. 바다 건너 이곳 이국의 땅에 새 둥지를 튼 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란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새삼 이러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제는 사치가 자연스러웠고, 그런 취미를 보유한 것에 다행스럽게도 수완이 좋았다. 하루가 다르게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영국의 기술력과 29년 전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스톡턴에 세계 최초의 철도가 개량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형제는 높이 샀다. 란이 움직인다면, 린도도 움직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부터 그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단 하나의 규율이자 숙명이었다.
잠시도 다른 길로 빠져들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또 다시 들이밀어지는 기차표에 익숙하게 티켓을 끊었다. 통상적인 경우 이런 것은 응당 역무원이 할 일이었지만 신설된 지 얼마 안 된 버밍엄 뉴스트리트 역에선 그 날 그 날 시간이 비는 다른 타임의 기장들이 역무원의 일까지 도맡아 수행해야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귀찮다고 생각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반대로 변덕스럽게 흥미를 끈 날에는 남들 눈에 번거로워 보여도 구태여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고 싶은가의 문제였다.
기관차를 모는 것은 보기보다 통쾌한 구석이 있었다. 자전거나 역마차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감이 그를 골수까지 차갑고 또 끓게 만들었다. 그는 일평생을 스릴에 맡겨 영국까지 흘러들어왔다. 이제와 남들의 생명마저 좌우하는 죽음의 핸들을 붙잡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철도를 시속 몇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한다 한들 그것은 새삼 놀라워할 거리도 되지 못 하는 것이었다.
“…싸인?”
앞에서 들려오는 의아한 음성에 눈길을 주지 않고 마저 펜촉을 그었다. 오후 8시 10분에 출발하는 너덜너덜한 일방통행 티켓 위, 으레 붉은 원이 그어져야 마땅한 출발 시각과 도착 시각 옆으로 하이타니의 이니셜을 휘갈긴 검은 싸인이 매끄럽게 잉크를 수놓았다. 서비스. 티켓을 돌려주며 대꾸한 짧은 한 마디에 창백한 낯의 블론드 소녀가 입술을 늘리며 까르르 웃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는 몰라도—관심 없어도—서비스 몫은 톡톡히 한 모양이었다. 하이타니는 미련 없이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음 승객을 받았다.
“글래스코행 8시 10분 열차 곧 출발합니다! 남아있는 승객 분들은 서두르십쇼!”
마지막 싸인을 휘갈기기가 무섭게 기관차 운전석 칸을 열고 동료 기관사 톰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아픈 아내와의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둔 배불뚝이 톰은 그의 절실한 처지만큼이나 직장과 동료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지만, 오늘처럼 사람이 몰리는 날이면 유독 스스로의 템퍼를 조절치 못 하는 버릇이 있었다. 벼락과도 같은 아우성에 플랫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뒤통수들이 규칙적으로 증기를 뿜고 있는 새카만 텐더 기관차로 우르르 달려들었다.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증기 기관차 쉭쉭 입김 내뿜는 소리가 아득하게 배어들었다. 멀어지는 뒷모습들을 잠자코 바라보던 하이타니는 이내 장갑 낀 손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차근히 거처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집에 가면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우편함에 들어차 있을 제비꽃 설탕 절임은 추호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버터도 마가린도 바르지 않은 깔끔한 브레드를 한 입 물어뜯고 소파에 긴 몸을 뉘일 생각이었다.
제비꽃 설탕 절임. 벌써 일주일째 똑같은 설탕절임이 제 우편함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개인적인 주소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므로 하이타니는 필히 그것이 란이 보낸 것이리라 짐작했었는데, 이에 관해 란에게 얘기를 꺼냈을 때 그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한 호기심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짓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굴까.
행거에 유니폼 자켓을 벗어 걸고 그 위에 모자를 올리려는 찰나, 가벼운 인기척이 소복히 쌓인 눈길 사이로 그의 뒤에 가까워져 왔다. 아직 올라타지 않은 승객이 있었나. 반쯤 풀었던 허리띠를 차분히 다시 고쳐 매며 벗어놓았던 자켓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둘러 입었다. 이내 주머니에서 제 이름이 박힌 만년필을 꺼내 무감히 뒤를 도는 순간,
“私もサインしてくれる?”
일본어.
고개가 멈췄다.
끊은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 빳빳한 글래스코행 특별석 티켓이 시야에 태연자약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숫자 옆에 그어진 핏빛 동그라미가 아직 덜 마른 고개를 새빨갛게 내밀었다.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눈길을 잡아끄는 땋은 머리카락과 색깔 짙은 염색모. 차가운 겨울 공기를 뚫고 와 닿는 서늘한 제비꽃 향기. 깡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게 육중한 모피 코트를 두른, 그 아래로는 영하의 날씨에 헐벗은 다리를 하고도 에로와는 썩 거리가 먼 자태. 불쾌하리만치 높은 목소리. 어느 모로 보나 어디 한 유서깊은 가문의 금지옥엽 귀하게 자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받았으면 또 받을 필요는 없는데.”
“알아. 그런데 하이타니 씨에게 받고 싶어.”
버릇없고 경거망동한 외동딸 아가씨.
내밀어진 티켓을 감감히 내려다보다 느리게 손을 뻗어 받았다. 이름을 어떻게 안 건진 둘째치고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철부지 어린애 돌려보내듯 말없이 손에 쥔 표를 바라보다 감흥없는 싸인을 휘익 그었다. 그가 끊는 반쪽짜리 티켓 위로 익숙한 배열의 일본식 풀네임이 알파벳으로 일그러졌다. 딱히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감상을 늘어놓을 것도 없이 그저 그런 이름. 아무렇게나 싸인이 그어진 티켓을 옆으로 뒤집어 돌려주자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받아들고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힐끔 하이타니의 눈치를 살폈다. 이만하면 됐겠지 싶어 시선을 무시하고 발길을 물리려는 순간, 남자의 손목을 여자가 잡아채 끌었다. 주머니에서 립스틱을 꺼낸 그녀가 남자가 팔목을 도로 물리기 전에 그의 손등에 저만의 조심스러운 낙인을 찍었다. 새하얀 장갑 위로 여자의 입술에 발린 것과 같은 장미색의 화상 같은 하트가 남았다.
“이건 내 싸인.”
여자가 볼을 발그레 밝히며 흡족스레 웃었다. 하이타니의 날선 눈매가 여자를 향했다 별다른 변동 없는 눈으로 제 손등을 가만 내려다봤다.
“그럼… 또 봐.”
아쉬움이 남은 표정의 여자가 선전포고와도 같은 인사를 남기며 마침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밭만큼이나 묵직한 코트의 무게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하얗고 까맣게 뒤덮었다. 또 보긴 무슨. 이로 장갑을 주욱 물어 벗긴 남자가 흰 천을 문질러 립스틱 자국이 보이지 않도록 거꾸로 장갑을 뒤집어 꼈다. 편도행이던데. 제 손으로 끊어준 일방향 티켓의 종이조각이 미풍에 펄럭이는 것을 바라보다 미련 없이 한 손으로 구겨 쓰레기통에 밀어 던졌다. 구겨진 티켓 휑뎅그런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소리와 함께 지리멸렬한 겨울의 바람 소리가 락커룸 내부를 메아리처럼 채웠다.
그것이 그 여자와의 첫만남이었다. 떼어내고 떼어내도 포기를 모르는 시시한 잡귀 같은 여자. 시답잖은 이야깃거리로 쉬지 않고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거머리 같은 계집. 훗날 하이타니의 모든 시시하고 저릿한 혐오들의 근원이 되는, 진절머리나는 이노우에 치즈루를 만난 그 권피한 계절. 열두 번 울리는 벽시계의 종소리와 함께, 1854년의 눈보라가 겨울을 알렸다.
2
“깼어?”
눈을 뜬 린도를 반긴 건 슬슬 익숙해질 때가 된 깨끗한 아이보리색의 천장이었다. 창문 너머로 인근 담배 공장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떼를 이루어 이동하고 있었다. 여상한 정장 차림의 란이 허리를 꼿꼿히 세운 뒷모습으로 벽에 붙은 달력을 검지 끝으로 짚어가며 비스듬히 뒷장을 넘겼다. “집에 누군가 들어오는데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정도로 둔하진 않아.” 린도가 상체를 느리게 일으켜 세우며 답했다. 불퉁스런 대답에 란이 입술을 늘렸다.
“우편함 확인해봐. 배달 왔더라. 좋은 냄새가 나던데.”
“됐어. 쓰레기야.”
그가 칭하는 바를 단박에 알아들은 린도가 얕게 인상을 구겼다.
“그 여자야?”
“응.”
“정성이 대단하네. 안 먹을 걸 뻔히 알고도 벌써 두 달째잖아.”
“미련스러운 거지. 멍청한 거고.”
존재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어지는 란의 웃음소리를 린도는 부러 못 들은 체했다.
‘또 보자’던 여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여자는 돌아왔고, 그 후로도 돌아왔다. 그가 가는 곳을 기웃거리고, 그의 싸인을 받기 위해 매일같이 타지도 않을 기차의 편도 표를 끊고, 매표소의 창가 자리에 전세를 내고 앉아 신문 너머 그의 옆선을 노골적인 곁눈질로 훔쳐보기를 즐겼다. 그 적나라한 관음증 환자 같은 눈을 피해 어느 방향을 따라 걸어도 끊임없이 뒤를 따라붙는 그림자가 돌고 돌았다. 그의 영역이 버밍엄 뉴스트리트에 있는 한은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무의미한 꼬리잡기였다.
란이 가져다준 플랫 브레드에 샐러드를 한 입 베어물자 향긋한 풀향이 잇새로 파고들었다. 질기지 못 한 빵을 소리 없이 입 속으로 씹어 먹으면서 십자가에 못을 박듯 기억에 송곳니를 박고 기분 나쁜 여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무의식의 일대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이노우에 치즈루. 이노우에 치즈루. 이노우에 치즈루….
이노우에 치즈루. 웨스트 미들랜즈 관할의 명망 높은 치안 판사, 에드워드 이노우에가 애지중지 아낀다는 하나뿐인 고명딸. 그 귀하디 귀한 신분에 역설적이게도 음험하고 천한 취미를 가진, 두 눈 희번득 뜬 사마귀. 발정난 스토커 (하이타니는 그를 ‘범죄자’라고 부르기를 선호했다).
반쯤 남은 빵을 내려놓고 의자 위에 걸어놓았던 자켓을 집어들었다. 란의 시선이 뒤따랐다.
“출근?”
“응.”
“열심이네.”
“형을 위한 거야.”
“알아, 고마워.”
이제와 새삼스러운 말에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고맙다는 말이 비단 그의 출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인망이 두터운 치안 판사의 딸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형제의 계획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 했다. 하이타니가 여자를 가만히 설치게 두는 것은 오직 그 이유 하나였다.
문고리를 돌리자 문틈으로 찬바람이 강하게 불어 들어왔다. 두 번 돌아보는 법 없이 하이타니는 아지트를 나왔다. 그는 늘 그랬다.
3
연초의 열기가 가라앉은 스테이션은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한산했다. 운전석의 배불뚝이 톰이 창문 너머 쉴새없이 하품했다. 역무실의 벽시계가 오후 다섯 시 십 분을 알리고, 하이타니는 오늘도 그를 찾아온 여자의 편도행 티켓을 끊었다. 우악스러운 모피 코트를 입은 여자는 어김없이 그에게 자신의 ‘싸인’을 남기고 싶어하는 눈치를 주었고 하이타니는 그녀의 눈길을 무시했지만, 여자가 기어코 자신의 손목을 끌어 손등에 립스틱 바른 입술 자국을 찍었을 때는 그저 주머니에 든 나이프로 그녀의 목을 단숨에 끊어버리는 상상을 수도 없이 반복했을 뿐, 겉으로는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를 유령 취급하듯 시선조차 주지 않는 것이 그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고 싶은가의 문제여야 했다. 한 번도 고려 사항이었던 적 없던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가 하이타니 앞에 불청객처럼 끼어들었다.
하이타니의 서늘한 눈빛을 훔쳐보며 얼굴을 붉힌 여자가 언제나처럼 매표소 앞 기다란 철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읽지도 않을 신문을 보란듯이 펼쳐들었다. 나비처럼 펼쳐진 종잇장 너머 여자의 힐끔대는 눈길이 저를 향하는 것을 하이타니는 모르지 않았다. 그는 손등에 선명히 남은 립스틱 자국을 신경질적인 손길로 문질러 닦았다. 싸인을 요구하고, 립스틱을 찍고, 뒷모습을 쫓고. 그럼에도 한사코 전화번호를 요구하거나 손수건에 자신의 번호를 남기고 가는 따위의 행동을 하지 않는 점이 의문스러웠다. 그녀의 욕망은 하이타니를 관음하는 것에 있을 뿐, 교류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교류에 의의를 갖지 않는 건 아마도 상대가 원할 때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원할 때 상대를 찾아오고 싶기 때문이리라.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애초부터 일방향을 택한 편도행의 마음. 이기적인 애욕이군. 립스틱의 흔적이 지워진 손등을 내려다보며 하이타니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것과 갈망하는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뒤꽁무니로 음침한 눈초리가 주인 쫓는 개처럼 졸졸 뒤따랐다.
4
첫 달을 넘기고 머잖아 사그라들 줄 알았던 웨스트 미들랜즈의 눈보라는 날을 거듭할수록 되려 혹독해져 돌아왔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눈안개에 안경알 너머 하이타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유쾌치 못한 하루였다. 하이타니는 기본적으로 몸을 굳게 만드는 겨울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 지겨운 눈보라와 눈이 쌓인 아지트의 지하 계단도 달갑지 않았다. 그의 옆집에 사는, 가끔 늦은 오후 출근길에 마주칠 때면 까딱거리는 눈인사 정도는 나누곤 했던 젊은 여자는 오늘 아침 싸늘한 변사체가 되어 보기 흉한 몰골로 발견되었다. 두 눈과 혀가 보란듯이 도려내진 채 찐득하게 말라붙은 피로 지저분해진 그 마룻바닥의 저의를 하이타니는 모르지 않았다. 살인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담은 눈과 대화를 나눈 입술을 앗아간 그 행위에 어떠한 저의가 함축되어 있는지. 기분이 나쁜 건 여자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꼴사납게 제게 경고 같은 것을 하려 드는 모양새가 같잖았기 때문이다. 질투에 눈이 먼 계집의 살육 따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 했다. 질기게 잘려나간 단면, 마구잡이로 흩어진 핏방울, 고상치 못한 살해 현장은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못 했다. 하이타니는 그 날 아침도 언제나와 같이 플랫 브레드에 샐러드를 곁들여 먹으며 집을 나섰다. 역에는 계집이 없었고, 하이타니는 오랜만에 자신을 끈질기게 관찰하는 시선으로부터 분리된 채 독립된 공간에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당분간 눈이 그칠 때까지는 이 플랫폼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전용 락커에 자켓과 모자를 걸고 눈이 쌓인 퇴근길을 밟는 내내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아지트까지 불과 십오 분여 거리를 남겨둔 어느 한 골목길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어두컴컴한 골목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그의 뺨을 베었다. 보이지 않는 피 대신 구둣발에 쌓인 눈발을 턴 그는 어둠 속을 응시하던 눈길을 흘긋 옆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올 거면 지금 나와. 그 심드렁한 목소리에 그림자 아래 몸을 움츠리고 있던 수어 개의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하나같이 하이타니의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건장하고 억센 몸집의 맷집 좋은 사내들이었다. 굼뜨게 몸을 일으키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발걸음들을 보며 하이타니는 둔하기 짝이 없다는 짧막한 감상평을 마쳤다. 여섯, 많으면 일곱 쯤으로 보이는 그 다부진 사내들의 얼굴엔 긴장의 기색이 없었다. 이런 일들에 능숙하고 숙련된, 전문 의뢰를 받고 찾아온 업자들이라는 뜻이었다. 장갑을 두른 양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하이타니는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예고 없이 주먹이 날아오면, 허리를 뒤로 빼며 반동을 역이용한 무릎을 사내의 아랫배에 꽂았다. 쿨럭, 하고 기침이 나올 새도 없이 그대로 다리를 일 자로 펴 남자의 머리를 바닥까지 내리쳤다. 수적 우세는 언제나 인간들의 이성을 흐려놓았다. 명백히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기고 있다는 거짓된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주었다. 저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오는 서너 개의 손과 발들을 마주하며 하이타니는 간결하게 몸을 풀고, 주머니에서 뺀 주먹을 휘둘렀다. 가운뎃손가락의 뼈마디가 남자의 콧등을 강타할 때 뼈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바람을 갈랐다. 늑골을 부수고, 목뼈를 돌리고, 명치를 파고드는 내내 하이타니는 끊임없이 내리고 또 내리는 흰 눈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흩뿌려지는 핏방울 대신, 이맘때쯤이면 눈이 소복소복 쌓여 내쉬는 숨마다 뿌연 담배 연기 같은 입김이 흘러나올 롯폰기를 생각했다. 그는 정확히 스물 여덟 번의 주먹을 휘둘렀다. 일곱 번째 남자가 광대가 주저앉은 얼굴로 주르륵 미끄러져 빙판 위에 널브러졌을 때, 그의 깨진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를 내려다보며 하이타니는 끈덕진 핏자국으로 어지러웠던 이웃 여인의 마룻바닥을 생각했다. 뒤통수에 고여 있었을 피와, 생명력이 빠져나간 딱딱한 육신과, 아무것도 깃들어 있지 않은 텅 빈 동공 같은 것.
배가 고팠다. 그의 의식은 어느새 돌아가서 먹을 저녁 메뉴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다섯 번째 남자의 깊게 박힌 갈비뼈를 부러뜨릴 때 그가 반사적으로 휘두른 칼날에 입었던 자상이었다. 허리춤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집에 붕대가 있었던가, 피로 물든 빨간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없다면 옷을 찢어서 지혈해야 했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쉬웠다. 병원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얀 천장, 알싸한 소독 향, 새벽마다 울리는 삑삑거리는 호출음, 꼬부라진 혀로 신원을 캐묻는 푸른 눈의 영국인 의사…. 이럴 때면 문득 일본어가 듣고 싶어졌다. 병원 문을 두고 나뉜 위생과 비위생의 경계처럼, 어딘가의 문을 열고 자신이 있어야 할 롯폰기의 시내로 훌쩍 돌아가고 싶었다.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져 앉았다. 벽돌에 스민 눈발의 습기가 핏물 물든 자켓과 셔츠자락 너머로 젖어들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만큼은 눈이 그렇게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하이타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보지 않고도 손쉽게 그 발걸음의 주인을 알아맞출 수 있었다. 세뇌에 가까운 학습의 결과인지, 그의 기민한 감각이 원치 않은 곳에서마저 발동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집의 발소리는 언제나 동일했다. 보폭은 짧고, 걸음걸이는 얕았다. 가벼운 뼈대에 맞지 않게 체중이 뒤로 쏠리는 두꺼운 모피 코트를 짐짝처럼 달고 다녔다. 살의와는 거리가 먼, 그러나 다른 종류의 위협을 짐승의 표처럼 이마에 붙이고 살았다. 여자가 자신의 앞까지 오면 하이타니는 눈을 떴고, 이노우에는 그에게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러질 것 같은 작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이타니가 그 손바닥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으면, 입을 잠시 삐죽 내밀더니 알아서 하이타니의 손목을 휘어잡고 그 마른 체구로 그를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언제나처럼 미동도 않는 그의 손목을 함부로 이끄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강제적이었다. 첫 만남의 립스틱처럼, 두 번째 만남의 스토킹처럼, 세 번째 만남 때 손등에 찍었던 키스처럼, 오늘 아침에 발견된 싸늘한 여인의 주검처럼. 어두운 늦저녁, 그를 명확한 명분 없이 덮쳤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사내들이 지금 얼음 바닥에 어지러이 쓰러져 있는 것처럼. 동의를 받고 행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눈보라가 남겨진 발자국을 덮는 생생한 증거 인멸의 현장 속, 은밀하게 시행되는 지금의 납치 또한 그랬다. 아니, 납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어쨌든 제 발로 끌려간 건 하이타니였다. 그는 언제든 여자의 손목을 뿌리치고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제가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그럼에도 왜 굳이 그녀의 납치에 순순히 뒤따르기를 자행했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일이 마침 휴일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밖에는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5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손이 날아들었다. 페이퍼 나이프를 쥔 오른손은 쉽게 잡아챘지만 관자놀이를 찔러오는 주먹에는 맞아주었다.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야지만 어디까지 반격해야 그녀를 죽이지 않고 끝낼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커터칼이 드르륵거리며 그의 눈을 노리고 달려드는 낌새가 보이면, 먼젓번의 싸움으로 핏자국 말라붙은 허리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그녀의 마른 팔을 잡아채고 뒤로 꺾어 팔을 부러뜨려놓았다. 뼈마디 살갗을 뚫는 소리와 함께 이노우에가 비명을 삼켰다. 억눌린 잇새로 윽, 윽, 하며 차오르는 신음을 하이타니는 무시했고, 그녀의 손에 들린 커터칼을 뺏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처음부터 그저 맞아만 줄 생각은 없었지만 죽일 생각도 없었다. 이노우에도 필히 그것을 알았다. 전력으로 붙으면 여자는 십 초도 채 버티지 못 하고 순식간에 시체로 변모해버릴 수 있었다. 이웃집의 그 추하게 생을 마감해버린 여자처럼. 늑골이 부러지고, 살점은 뒤엉킨 채, 신원을 알아보기도 힘든 흉측한 몰골이 되어 들개들을 위한 먹이로 거리에 내버려질 수 있었다. 왜 무의미한 싸움을 자초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하이타니의 무신경한 눈빛을 마주한 이노우에가 웃었다. 왜 이러는지 궁금해?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질문에 하이타니는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싸움은 원래 잘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못하는 사람끼리 하면 다치니까. 잘하는 사람만이 죽기 직전까지 힘을 조절할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여우가 범에게 덤벼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생존전략인 셈이었다.
말이 끝나면 하이타니는 더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부러지지 않은 팔로 그를 더듬고 싶은 듯 지탱해오는 손을 가볍게 밀어내고, 여전히 호주머니에서 빼지 않은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그녀의 얇은 목을 닭모가지 비틀듯 움켜쥐었다. 살과 살이 맞닿자 피가 빨갛게 몰리면서도 여자는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미친년. 그 말을 속으로만 했는지 입밖으로도 뱉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목을 조르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자 여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그 뻐끔거리는 모양새가 보기 싫어 목에서 손을 놓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저를 애타게 바라봐오는 시선을 회피했다. 방 안은 여느 평범한 반지하의 감금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호화스러웠다. 굳이 다른 것을 놔두고 트윈 사이즈 베드를 선택한 저의는 둘째치고서라도, 반쯤 열려 있는 옷장 문 새로 진열된 옷들과 세심하게 골라놓은 가구, 깔끔한 아이보리색의 벽지마저 소름 끼칠 정도로 모든 것이 하이타니의 취향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문고리가 철컥하며 돌아갈 때 끼익하며 돌아가던 녹쇳구멍의 열쇠 또한 함께 돌아가던 것을 하이타니는 놓치지 않았다. 손아귀에 잡힌 이노우에가 볼품없이 버둥거렸다. 피가 몰린 얼굴은 어느새 발갛게 물든 지경을 지나 입술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들고 있던 목을 그대로 등 뒤에 놓인 유리 탁자 위로 내다꽂으며 하이타니는 비로소 이노우에의 목을 놓아주었다. 흰 뼈대가 드러나는 마른 몸이 탁자 위로 무너지면서 깨진 귀퉁이의 유리 파편이 이노우에의 왼쪽 눈밑에 기다란 흉터를 남겼다. 켁켁거리는 기침이 내장까지 토해질 것처럼 마르게 쏟아지고, 한쪽 얼굴을 피로 물들인 채 축 늘어진 이노우에가 탁자의 몸통에 기대 가쁜 숨을 골랐다. 반투명한 유리 위로 뺨을 타고 떨어진 핏줄기가 뚝뚝 동그란 형태를 그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몸을 한차례 떤 여자가 아직 멀쩡한 왼손의 손등으로 피를 훔치고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목을 소중하게 매만졌다. 하이타니의 흔적이 그녀 위에 남았다. 하이타니의 흔적이…….
“너무 미워하지 마, 하이타니 군.”
하이타니의 시선이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는 것을 본 이노우에가 말꼬리를 늘렸다. 눈이 마주치자 부끄럽다는 듯이 볼을 붉혔다. 내려다보는 눈빛에 짜증이 비쳤다.
“다쳤잖아.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응?”
폐부까지 스며드는 공기에 벅찬 숨을 흘린 이노우에가 힘겹게 말을 끌었다. 그녀는 하이타니가 열쇠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무감한 눈초리가 저토록 예리하게 제 몸을 꿰뚫을 리 없었다. 땀인지 생리적인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로 젖어든 눈꺼풀을 깜빡이다 시선을 내렸다. 눈길이 닿는 곳에 빨갛게 물들어 이노우에의 눈가와 마찬가지로 뚝뚝 피를 떨어뜨리고 있는 허리가 시야에 잡혔다. 옷장 밑 서랍을 끌어당겨 붕대와 가위를 꺼낸 이노우에가 치료해주고 싶다는 듯이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면, 하이타니가 매몰차게 그녀의 손등을 내치며 짜증스러운 미간을 구겼다. 손 대지 마. 이노우에가 다시금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덧나는데. 허리를 다치면 오늘처럼 주먹을 날쌔게 피하는 일도 힘들어질 거야. 게다가 하이타니 군은 평소에 허리를 많이 쓰는 편이니까 더 곤란하고. 그리고 말이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소리에 이골이 난 하이타니가 마침내 여자의 손에서 붕대를 뺏어들자 그제야 괴롭힘이 멈췄다. 이노우에가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마치 좋아하는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은 여자아이처럼. 뼈가 나가고 한쪽 뺨이 피로 물든 그런 기괴한 몰골로 웃어봤자 결코 귀여워 보일 일 없다는 걸 그녀는 이해하지 못 했다.
하이타니의 뒷모습이 좋았다. 물론 이따금씩 자신을 냉정하게 뒤돌아봐주는 앞모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자신이 있는 것을 뻔히 알고도 부러 고개를 돌아봐주지 않는 뒷모습 또한 애가 타도록 마음에 들었다. 마르지만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등이라던지 어깨, 네 번째 허리 구멍에 맞춘 검은 가죽벨트, 눈이 나쁘지도 않으면서 끼는 안경이나 뒤로 넘긴 밝은 머리카락,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가 좋았다. 피로 더럽혀진 셔츠를 벗고 익숙하게 붕대를 감는 뒷모습이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뼈가 도드라지기도 하고 문신이 들썩거리기도 했다. 형제와 반씩 나눠서 새긴 저 용 모양의 타투마저 이노우에는 절반의 몸에 넘치도록 사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셔츠 단추를 채운 하이타니가 무뚝뚝한 옆선으로 그녀에게 찾아와 가위를 내려놓으면…….
아, 저 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러나 때때로 짜증이나 경멸이 스치기도 하는 저 보라색 눈이 좋았다. 저 보라색 눈에 자신이 담기는 날이면 밤잠을 설칠 수 있을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이타니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줄 이노우에가 단 한 가지 그에게 속삭여주지 않을 비밀이 있었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마주했던 오래 전의 첫 만남. 1854년의 겨울보다 훨씬 앞선 언젠가의 여름. 그 때의 그 눈빛. 번쩍이는 태양 아래 내리깔린 긴 속눈썹과 유리알처럼 움직이던 보라색 눈동자. 그것만큼은 하이타니에게조차 공유될 수 없는, 오로지 그녀만의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만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 내밀한 눈에 꿰여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그 눈알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지사였다. 어떻게 해서든 하이타니를 가지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을수록 좋았다.
발길을 물리려는 하이타니를 붙잡고 그를 넘어뜨렸다. 침대 위로 하이타니가 쓰러질 때, 이노우에 역시 그의 위로 쓰러지며 부러진 팔이 욱신거렸다. 하이타니의 위로 올라탄 이노우에가 불빛을 등지고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웃었다. 쓰러질 때 반쯤 벗겨진 하이타니의 안경을 벗기고 그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머리맡에 과도가 놓여 있는 것을 하이타니는 말하지 않았다. 폭로하지 않으면 협박은 자발적인 것이 되었다. 서늘한 손가락이 목젖을 매만지고, 기다란 혀가 고개를 숙여 귓속을 파고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이노우에가 속삭였다. 하이타니 군은 매사 권태롭다는 표정을 짓고 살지.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을 그녀가 부러진 오른 손목으로 만지작거렸다. 하이타니는 그녀를 뿌리칠 수 있었다. 언제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하지만 난 하이타니 군으로 인해 권태로울 권리마저 박탈당했단 말이야.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그를 채근하며 뺨에 입을 맞추려 들었다. 하이타니가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위로 높게 치켜올렸던 머리카락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새에 어지럽게 헝클어져, 치렁치렁한 보랏빛 머릿결이 하이타니의 핏자국 말라붙은 살결 위로 비처럼 내렸다. 벌레처럼 성가시게 달라붙어오는 살갗을 밀치고 몸을 뒤집어 작은 어깨를 침대 아래로 처박았다. 몸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려는 것을 구둣발로 밟아 막으며 하이타니는 그의 형제와 나누었던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디로 가고 싶어?’
버밍엄은 하고 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 유일한 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일본에 남을 수도 있었다. 이 곳은 거점일 뿐 종착역이 아니었다. 그들의 영역은 언제까지나 롯폰기였고, 앞으로도 롯폰기여야만 했다. 그 곳에서는 어쩌면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계집을 떼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이타니는 스치듯이 생각했다.
‘지중해로.’
영국에 온 것은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다른 바다도 좋았지만, 이왕이면 그들의 머리카락만큼이나 푸르른 지중해가 있는 곳이었으면 했다. 보라색 빛이 가물거리는 지중해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가의 문제였다.
침대 아래 늘어진 몸이 그의 손아귀에 갇혀 옴싹달싹 못 하는 것을 무감히 바라보다 그대로 머리를 끌어 협탁에 내리찍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범이 여우를 봐줄 수 있는 정도로만. 힘을 풀어 내리찍고 새하얀 몸에 의식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보랏빛으로 멍든 그의 손등 위로 같은 색의 빗줄기가 내렸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이노우에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열쇠를 집어들었다. 그럼 그렇지. 열쇠는 줄곧 그의 머리맡에 있었다. 여자는 그에게 미움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