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님의 켈틱 크로스 타로입니다



 ‘어떠한 이유도 없어. 똑똑히 알아둬.’
 하이타니 린도는 왜 이노우에 치즈루를 혐오하는가? 시니컬한 양키와 롯폰기의 미친년은 키워드로 나란히 나열해두면 그냥 길을 가다가도 잘못 얽혀 지긋지긋한 일을 겪을 법한 서술입니다. 그럼에도 키워드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을 가지고 비틀린 생각들을 잘못 짚고 또 오해하는… 이것은 그 감정에 대한 간결한 기록입니다.

 하이타니의 혐오는 어떤 형상을 띠는가
 완드 9. 하이타니는 가진 것이 많은 소년이다. 풍족한 삶, 자신을 따르는 얼굴들, 어떻게 망가뜨려도 다시 돌아오는 것들이 그를 지루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얽매기도 한다. 하이타니가 가진 것들은 전부 불안정하다.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 소년은 그 불안정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으나 하이타니만은 알고 있다. 여덟 개의 막대가 그의 발 밑에 있다. 가장 으뜸되는 막대를 손에 쥐고도 그는 자기 발 밑의 것들이 언제 부러져버릴지 두려워한다. 자신 또한 이러한 막대기와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한다. 그의 혐오는 이러한 불안감이 그대로 전사된 것이다. 이노우에는 너무도 부러지기 쉬운 몰골을 하고 있다. 자신이 그러기로 결단내리기만 한다면 이노우에는 그의 발 밑에서 자근자근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이노우에는 또한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친년 같다가도, 자신은 모르는 세계의 법칙을 통달한 마녀 같다가도, 그런 것들에 하등 관심 두지 않는 골 빈 여자애 같다. 하이타니는 그것이 역겹고, 또한 부럽다.

 이 혐오는 어째서 관계의 단절을 이루지 않는가
 컵 5. 부러움과 역겨움, 두려움과 비웃음에는 방향이 없다. 하이타니는 그려진 지도를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다. 남들이 그어둔 선 위에 자신이 원하는 새빨간 곡선을 그리곤 그것이 자신의 길이라 말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길에 종종 닥쳐드는 유혹이 있다. 하이타니는 자신이 무언가에 유혹되고 휘둘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안다.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때에 눈앞에 펼쳐져야 할 것은 수평선 뿐이다. 그래서 저 멀리 세이렌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키를 비틀어 잡고, 붉은 곡선을 빗겨가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다시 자신이 그어둔 곡선 위로 돌아간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군다. 이노우에는 하이타니가 자신에게 전력 질주하여 다가오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런 부분마저 사랑하기에, 노래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거슬리고, 거슬리고, 계속해서 거슬려서 하이타니로 하여금 자꾸만 방향을 수정하게 만든다. 하이타니에게 이노우에는 달콤하지 않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는 존재다.

 혐오의 근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펜타클 에이스. 하이타니는 스스로를 거대한 바다괴물이라 여긴다(실제로 그가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다). 이 바다괴물은 징그러운 촉수와 수없이 많은 빨판으로 한 번 쥔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혐오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하이타니는 그러한 형상이 공포스러움을 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공포스러워하는 소년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가진 것들이 제 욕망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작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소년이란 무엇인가. 그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전부 부숴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하이타니는 자신이 저 깊은 바다 속, 인간의 첨단 과학조차 닿을 수 없는 바닥에 웅크리고 드러누워 버릴 자신의 욕망이 공포스럽다. 여덟 개의 막대기는 이내 바다괴물의 여덟 다리가 된다. 소유욕은 소유물 자체가 되고, 소유물은 소유욕 자체가 되어,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그는 무엇도 잡을 필요 없는 양키로서…

 혐오의 시작은 어디였는가
 펜타클 5. 어느날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에게 사랑한다는 언어를 처음 뱉었을 때, 두 사람 모두 그것이 하이타니에게 ‘적합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이타니는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비웃음의 표정으로, 이노우에는 자신과 같이 환희하지 않는 표정으로 그 기준을 세웠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아는 것은 자신이 내뱉어야만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고, 그의 머릿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나를 너의 여자로 두라는 애걸은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순수한 행위다. 아름답고 순수한, 포근히 쌓이는 첫눈처럼 진실한. 허나 하이타니에게 그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 바닥에 쌓여, 차 한 대 두 대만 지나가도 새까맣게 더럽혀질 것과 같다. 부리로 털을 골라 매끄럽고 새하얀 백로라고 할지언정 하이타니의 머릿속에서는 차등이 없다. 살아있는 백로 위를 밟고 지나갈 바이크는 많다. 타이어 사이에 피가 묻고 깃털이 들러붙어도 세차를 하면 그만이다. 

 혐오가 구체화되는 모양은 무엇인가
 완드 킹. 이노우에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진다. 하이타니가 무엇을 외치든 이노우에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타니가 흠집을 낼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하이타니가 열정을 뱉을 수 있는, 욕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절박하지만 추악하지 않고, 끊임없지만 초조하지 않다. 이노우에는 하이타니가 쥐고 있는, 놓쳐서는 안 될 막대기 위에 올라가 춤을 춘다. 소유욕 자체, 소유물 자체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을 모욕한다. 악바리를 쓰며 증오할 필요도 없이 그저 사붓이 웃으며 그것들에 어떤 의미도 없음을 온몸으로 보인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노우에에게 하이타니 외의 것엔 어떤 의미도 없다. 길가에 떨어진 썩은 낙엽 한 장과도 같다. 하이타니는 이 종잡을 수 없고 규율을 부숴내는 여자애가 걸리적거려 저 역시 의미 없음을 보이고 싶으나 가능하지 않다. 도도군이 눈을 노리고 린쨩이 손등을 찍으려 할 때,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년 얼굴에 흠집을 내었을 때, 그 모든 순간을 이노우에는 결속으로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혐오가 나아갈 방향이 존재하는가
 펜타클 9. 하이타니가 슬쩍 웃음을 짓게 될 때, 역겨움 위를 비웃김이 포장하고, 그 조소 위로 남들이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미소가 덧씌워질 때, 그때 그는 벼락을 맞듯이 깨닫게 될 것이다. 이노우에를 옆에 두었다는 것만으로도, 이것을 완전히 부수어 없애버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애매한 불편함과 두려움 따위로 망설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이 미친년에게 결속되어버린 것을. 결속이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저주와도 같다. 이제 하이타니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이노우에의 얼굴을 읽을 줄 알게 되었고, 이노우에는 하이타니의 거부가 언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과실나무 아래서 울어대는 새는 백로보다 작고 날쌔다. 달려들어 잡아 뭉개 없애려고 해보았자 저만 망신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소유욕와 소유물 이전의 문제다. 원하지 않았는데 마당 안쪽으로 들어와 버린 불청객을 이제는 더 이상 걸러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하이타니가 그럼에도 이 혐오를 유지하는 마음은 어떠한 형상을 띠는가
 펜타클 프린스. 어느 시점 이후 그의 불쾌는 더 이상 선후관계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여기서 그는 하이타니를 의미하지만, 정념의 선후관계를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은 이노우에가 먼저였으므로 방향성을 잃은 지점에서 그들은 드디어 합일한다(이런 방식의 사고회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노우에 뿐이므로 하이타니는 여전히 자신이 이노우에와 ‘다르다’고 여긴다). 너무 오래 미친 여자 곁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를 어떤 방식으로는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는 더욱 깊이 혐오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폭력의 피해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선 것과도 같은 감정적 전이를 겪는데, 이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동정한다 착각하고, 자신이 무력하다고 착각하는 순간 일어난다. 하이타니는 무력하지 않지만 이노우에의 ‘처분’이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것을 점점 느낀다. ‘걸러낼 수 없음’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성인이 된 뒤 그는 종종 이노우에의 눈빛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든 행동들이 자신을 어떤 전시품으로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는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혐오가 약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안정된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하이타니의 주변인은 이러한 혐오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심판. 시작할 때는 분명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웃긴 애가 붙었네, 미친년이 나대네, 정도로 평가받곤 했던 이노우에는 어느 순간 이노우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바닷가에 멀뚱히 내려앉아 있던 갈메기 떼처럼 그들은 이노우에가 하이타니의 근처에서 살랑거리다가, 소리를 지르다가, 웃다가, 칼날을 들이미는 것을 가만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날아오르더니, 하이타니가 얼마나 이노우에를 ‘아꼈는지’ 떠들기 시작한다. 걔 성격에 그 여자애 얼굴에 흉터 하나 겨우 달아주고 말았다고? 사실 걔도 즐기는 거지. 따먹기는 애저녁에 따먹었을걸? 그럼 맛이 좋았단 것 아냐. 장난감 할 게 제 발로 굴러들어온 게 얼마나 좋은데 표정이 그렇대. 나 같으면 팔다리라도 잘라서 가둬놨겠다. 그런 것들은 하이타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입단속을 당했지만, 어느 누구도 하이타니의 혐오가 근원적임을,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더럽다고 느껴짐’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이타니가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 킹. 어쩌면 그는 이 혐오가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강렬한 감정들은 비늘 사이사이 스며들어 바다괴물의 매끈해 보이는 갑주 안쪽으로도 어떻게든 파고든다. 그는 거대한 소유욕의 바다에서 스스로의 자아에 허우적거리는 자였으나, 이노우에의 지독한 불확실성과 비현실성이 그의 이러한 끝없는 침잠을 방해하였다. 하이타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다괴물의 형상에서 반인반수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증오의 대상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에 의해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야쿠자가 되었든 클럽 오너가 되었든 하이타니의 세상은 부유하는 양키에서 실존하는 공간에 발붙인 ‘어른’으로 변화하였다. 그런 변화 사이에서 그가 튕겨 나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에는 이노우에가 있다. 그는 이전과 똑같이 이노우에를 경멸하고, 언제든 자신이 부르면 나타나는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구둣발로 치마 안쪽을 밟아대며 변화하였으나 변화하지 않은 인간으로 남는다. 소년은 소녀를 착취하며 어른의 탈을 쓴다.

 종장
 컵 7. 어떠한 감정, 어떠한 욕망들은 평생 이루어지지 못한다. 아무리 끝없는 입력값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릇에는 용량이 있고 컵에는 크기가 있다. 블랙홀과 같은 수집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노우에의 거대한 사랑과 집착은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하이타니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한다. 그의 욕망이란 소유하고픈 것, 안정하고픈 것, 아니 그것도 아니고 멋대로 하고픈 것, 멋대로 방랑하는 것,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기를 바라는 것… 단순히 사춘기의 반항이라고만 할 수 없는 복잡하고 뒤엉킨 욕망들은 그 누구도 실현시켜 줄 수 없다. 적어도 하이타니는 이노우에에게 그것만은 이겼다. 내가 너의 사랑이라는 것을 흠집낼 수 없는 만큼, 너도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만족스럽게 한다.
 하지만, 만족이라 함은 충족과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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