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미사보를 쓴 여자
告解錄
W 자철
하얀 능선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다. 창밖에서 내리는 눈발은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날은 찼고 새벽에 트는 동은 지나치게 붉다. 야외의 살벌함을 보면서도 더위에 허덕였다. 저번 주쯤 히터를 끄고 섹스했다가 동사할 뻔한 우스운 경험 이후로 방은 언제나 후덥지근했다. 끈적한 땀이 싫어서 온도를 낮추면 이노우에는 평소보다 끈질기게 팔뚝에 달라붙었다. 그 꼴을 받아주면서도 애초에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끔찍한 열대야를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느릿하게 퍼져나가는 주홍빛이 산등성이를 무섭게도 찔러댄다. 아직 팔자 좋게 자는 여자애를 보면서 밤을 떠올린다. 몇 번 교접하더라도 손놀림은 능숙해지지 못한다. 시키지도 않은 수음을 한다고 달려드는 걸 막는 일도 고단했다. 이마를 밀어내면 손을 뻗었다. 성기를 손에 쥐곤 크리스마스에 레고 선물을 받은 애들처럼 군다. 애무를 하겠다는 건지, 시답잖은 소꿉장난을 하려는 건지 분간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손속은 과격하고 간지럽다. 성기를 매만지는 이노우에의 손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치고 어깨를 슬 밀었다. 이노우에와 하는 정사에서 수음은 늘 빼먹고 싶은 업무다. 말랑한 손바닥으로 좆대가리를 문지르면 불쾌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또래의 커플을 잘 모르지마는 다들 이런 개 같은 걸 감내하고 섹스를 하는 건지 궁금했다. 팬티 안에나 넣어두면 든든한 치부를 굳이 꺼내 타인 손에 맡기고 그걸 다시 남을 가로지르고 받아들이는 데 쓰고 있냐고. 그딴 걸 원해서 눈이 시퍼렇게 되는 성욕과 욕정은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지 않나. 역시 도쿄의 홍등가는 돈을 뱉어내는 ATM으로 제격이지만 썩 상종하고픈 집단은 아니다. 성교를 미뤄둔 체납금 지불하듯 처리하는데 이골이 난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 냄새가 매캐하게 코밑을 스쳤다. 침대 위로 자빠진 몸을 본다. 마른 뼈대의 몸이 침대 위에서 가엽게 떨고 있었다. 섹스는 지루하고 손장난은 불쾌하지만,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때마침 이노우에가 허리를 띄우며 칭얼거렸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맛이 느껴진다. 실온에 오래 둔 콜라를 먹은 듯 들척지근하다. 성마른 태도로 이노우에의 발목을 움켜줬다. 시발…. 누구 좋자고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 지경이 되기까지 책임은 없었다. 모조리 이 여자가 벌인 짓 아닌가? 흰 가슴팍이 열기로 얼룩덜룩하게 붉어져 있었다. 입으로 빨아대지 않아도 곧잘 붉어지는 살성이었다. 유독 마른 쇄골 부근을 짚으면 거세게 뛰는 맥박이 느껴진다. 언제나 동일한 감상이다. 이렇게 무른 이노우에의 몸을 열고 사이를 가르는 건 쉽다. 허벅지를 벌린다. 그러면 자신도 놀랄 만큼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어쨌거나 연인이었고 어쨌거나 섹스이므로 마지막에는 사정하고 절정에 이르게 됐다. 복숭아뼈 아래 움푹한 곳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비어야만 하는 곳이 불가결하게 채워지는 감각이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결국 범하고만……. 성역 아닌 어수룩한 총잡이들의 할렘가 같은. 머리가 차게 식는다. 성기는 여태 벌떡이며 서 있었다. 더는 미루지 못할 성교를 거행하기 위해 여자의 굴곡을 타고 그위로 몸을 겹치는 순간,
“눈….”
눈이 내렸다. 목덜미를 더듬을 뻔한 추태를 면한다. 이노우에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벙긋한다. 열에 들뜬 주제에 창밖에서 내린 눈을 본 모양이다. 어깨를 잡아누르자 창밖을 보던 눈이 위를 향한다. 그래. 우리는 이걸 하려고 했잖아. 불쑥 나쁜 심보가 치솟았다. 부드러운 몸에 과격한 행위를 더한다. 나는 그토록 교합 행위의 불필요성과 저열함에 관해 나열해놓고 오늘따라 유독 집요하게 굴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뇌까지 진탕이 되어갔다. 이노우에 역시 가늘게 교성을 뽑아내기만 했다. 그러나 이노우에를 내리누르고 몸 위로 올려 껴안는 동안에 나는 그놈의 눈이 계속해서 내린다는 걸 신경 썼다. 빌어먹을 눈이 바람에 녹지 않고 계속해서 지반 위로 쌓이고 있었다. 눈이 계속해서 내렸다. 정액을 배출하고 이노우에의 발가락이 곱아들 동안에도. 심지어 피로를 이기지 못한 애인이 잠들고 난 다음에도 눈이 내렸다.
그런데 아직도 눈은 그치지 않는다. 침대 헤드에 기대 쏟아지는 붉은 장막을 감상한다. 빛들은 살금살금 기어들어 와 영역을 탐내더니 기세 좋게 이노우에의 발치에도 엉덩이를 들이민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자는 탓에 체구가 더욱 작아 보인다. 잠든 여자의 얼굴에서 어젯밤 본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내가 본 어떤 표정도 여기에는 없다. 거만이 아닌 명백한 사실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노우에는 절대 평안하지 않다. 속세에서 말하는 사랑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거위 털로 채워진 베개라면 이노우에가 말하는 사랑은 정반대의 것이다. 무겁고 강렬하며 딱딱해서 부딪히면 반드시 멍이 든다. 이노우에는 평상시에 말도 안 되는 예찬론을 늘어뜨리지만, 자신이 객관적으로 본 애정은 명확하게 쓴 맛이었다. 거칠고 폭력적이며 맹목적이다. 아무리 실크나 손수 직조한 면사포로 덮어도 울퉁불퉁한 안의 면류관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10년의 세월 중 처음 3년간은 분명 인식하지 않은 듯한데, 지금은 한 매트리스 위에 같이 있었다. 냉정하게 셈하자면 3년도 아닌 5년, 어쩌면 7년간 이노우에는 사물을 넘어선 객체로 인지되지 못했다. 자신이 이노우에의 이름을 부르거나 인식한 세월만을 뽑아 합치면 10년의 반도 안 될 터였다. 연애 감정은 고사하고 인간적인 호감마저 없었다. 실상 이노우에라는 애를 자각한 세월보다 미치광이가 따라붙었다는 걸 인지한 시간이 길 터다. 그런데도 마지막에는 여자가 이겼다. 그 몰상식한 사랑의 힘으로. 폭력적이고 난폭한 물량 공세가 마침내 빛을 발하고 말았다. 이는 지극히도 개인적인 나의 불행이다. 얄팍한 쇳덩이 주제에 약지를 꽉 죄는 반지는 딱 이노우에를 닮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신체 일부분처럼 딱 붙어 도저히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노우에는 버려도 버려도 자꾸 돌아오는 저주 반지였다. 낀다고 해서 정신을 녹여 버리는 짓은 하지 않으나 집착적으로 돌아왔고, 계속해서 우편함에 들어있었다. 저주가 아니면 차라리 사랑이어라. 그래, 네가 자꾸 말하는 그놈의 사랑.
자는 이노우에의 이마를 검지로 누른다. 힘주어 누르려다가 관둔다. 자국이 남아 밉상스러운 얼굴이 되어도 기뻐할 꼴이 눈에 선했다. 제 이마를 누가 찌르는지도 모르고 여자는 새근새근 잘도 잤다. 깨어 있을 때와 영판 다르다. 태평한 얼굴이 기쁨으로 녹아내리는 광경을 익히 봐 왔다. 애인이 자신을 발견한 순간 이루어지는 변화는 언제나 화려했다. 여자의 얼굴은 이토록 많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아미에 붙어있는 작은 근육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항상 제 것과 달리 극적으로 움직인다. 미간이 좁아 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가 야금거리며 말하는 모습은 아무리 찾아도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모든 여자가 그런 식으로 이목구비를 움직이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런 건 이 녀석만 할 수 있었다. 치욕스럽게도 인정해야 했다. 이노우에가 간절한 모습으로 손을 모으고 사랑한다고 지껄일 때면, 나는 금세 가본 적도 없는 성당의 고해소 안에 있게 된다. 신자 석도 신부 석도 아닌 그것들의 머리 위에 떠다니며 고해 같은 찬가들을 내리 듣게 됐다. 여기는 찬송가를 부르는 곳이 아니라고 윽박질러도 말을 들어 먹지를 않았다. 흰 백합이 수놓아진 미사보를 쓰고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 깐 눈은 위로 들린 적이 없다. 이노우에는 항상 똑같은 말을 해댔다. 조합하는 어간과 어미가 다를지라도 내용은 매한가지다. 사랑! 그놈의 사랑.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 따위가 사람을 죽이고 살렸다가 했다. 멀쩡하게 허파를 이용해 숨 쉬고 있으면서 이노우에는 죽기도 했고 살아나기도 했다. 이노우에에게 말 걸지도 않은 내가 걔를 몇 번이나 죽이고 살렸는지 모른다. 누구든 경찰에 신고했다면 어릴 적 살았던 징역이 우스울 정도로 긴 형을 선고 받았겠지. 우습지도 않다. 그까짓 사랑이, 어떻게 사람이 지닌 환부를 꿰매고 비틀었다가 다시 살이 돋아나게 만드는가……. 멍청한 놈. 베개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한쪽으로 모아 넘겨준다.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평온한 얼굴로 잠드는 모습이 참으로… 순결한 신자의 모습이다. 문득 나체인 몸이 식어감을 느꼈다. 여즉 옷가지를 챙겨 입지 않은 육신과 약지에 씌워진 반지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 뿐이다. 여전히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이노우에가 인식한 그것이 계속해서 내린다.
기다림이 지루해진 나는
눈 위에다가 고해록을 쓰려다가
적을 것이 없어 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