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피스 v V
W 자철
치즈땅! 빨간 뿔테 더벅머리 키 백육십에 몸무게는 과하게 키에 비례하는 아무개가 치즈루를 불러 세웠다. 치즈는 하이타니의 뒤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아무개가 하는 말은 하수구로 졸졸 흘러갔다. 하이타니가 듣지 않는 치즈루의 말은 맑은 개울에 졸졸 흘러가는데 아무개의 말은 하수구로 들어가니 슬픈 노릇이다. 하지만 모두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는 법. 악취가 나는 말은 구정물에, 향기가 나는 말은 빠져 죽어도 맑은 물에 흘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사는 원래 공평하지 않다. 어쨌거나 치즈땅으로 시작한 말은 멈출 줄을 모른다. 好きだよ는 결국 세상에 나와 버린다. 하이타니는 치즈루가 듣지 못하는 고백을 제대로 들어 버리고 만다. 엉망진창은 여기서부터다. 아무개의 고백을 치즈루가 아니라 하이타니가 수신해버린 점. 남자는 즉각적으로 대응한다. 구타는 손속에 자비가 없다. 물론 딱 한 대였을지라도 하루에 300걸음 내외를 간신히 걷는 아무개 씨에게는 엄청난 충격이다. 우와 역시 하이타니 씨. 사람들은 웅성대지만 치즈루는 이제야 귀가 뻥 뚫린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린도는 역시 제 고백만 유효하게 받아준다는 거다!
하이타니 린도가 이노우에 치즈루를 달고 다니는 걸 롯폰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치즈루가 하이타니를 악착스레 따라다닐 뿐이지만 사람들 눈에는 영 다르게 비친다. 그의 주먹에 다림질된 놈들일수록 후자보다는 전자에 의견을 모은다. 아무리 윽박지르고 욕을 하고 꽃 같은 얼굴에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도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점점 린도의 옆자리는 역시 치즈루라는 인식이 생기고 만다. 그렇다고 하이타니로서는 대응하기도 우습다. 저게 뭐라고 자신이 나선다는 말인가? 무시도 거절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멍청한 뇌에나 묵념할 일이지 어쩌고 떠들 일이 아니었다. 하여간 주변에는 멍청한 놈들이 많았다. 나약하면서 주절거리기를 좋아하고 남 일에 과장된 소문을 붙이는 일을 즐기는 놈들이. 치즈루는 그런 점에서 하이타니의 심기를 미묘하게 거스르지 않았다. 나약하지만 끈기가 있었고 주절거리지만 남 일에 입을 나불대지 않았다. 언제나 한 끗 차로 벗어나는 모습이 오히려 짜증 날 때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허나 치즈루는 하이타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현명하게 굴려고 노력했기에 그의 뒤를 쫓아다닐 수 있었다.
문제는 이노우에가 하는 게 사랑이라는 데 있었다. 가장 멍청한 건 단연 사랑이기 때문에 현명하고자 하는 치즈루도 분별없이 굴 때가 있었다. 하이타니와 이야기 하는 여자들을 향한 판단력이었다. 사랑은 강력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치즈루에게 거대한 힘을 가져다주었지만 늘 만능은 아니었다. 이노우에는 린도와 말을 한, 또래 여자는 빼놓지 않고 모두 손을 봤는데 이는 몹시 은밀하고 철저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종종 엉뚱하게 뺨을 맞고 후퇴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상대는 머리채가 모조리 뽑혀 대머리가 되기 직전이었지만 어쨌거나 이노우에도 맞긴 맞은 상태였다. 하이타니는 제 형제와 나란히 서 뺨을 벌겋게 붉힌 채 다가오는 이노우에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개인을 향한 관심이라기보다 사람 개인의 출중한 관찰력이 힘을 발휘한 탓이었다. 남자는 여자애들이 자신에게 올 때 뺨이 발그레한 일이야 숱하고, 개중 치즈루야 당연히 복사꽃 같은 꼴을 한다는 걸 알았다. 다만 오늘은 분칠한 정도를 넘어선 붉음이었고 얼핏 보니 미묘하게 부은 게 딱 뺨을 얻어맞은 꼴이었다.
남자에게 터졌다면 보다 심했을 테고, 남은 건 여자였는데 애꿎게 맞고 올 작자는 아니였기에 늘 하던 일이 잘 안 됐던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이노우에가 알았다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몇 시간은 펑펑 울었을 사실이었다. 투기는 귀여운 소녀의 몫이 아니라지 않는가? 각설하고 남자로서도 그다지 관심 없는 정보였으나, 모르기도 어려웠다. 하이타니가 치즈루에게 기울이는 관심은 전무했으나 주위 사내놈들은 입장이 달랐다. 예쁘장한 여자애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썼고 그들이 가장 자주 보는 여자는 하이타니의 치즈루였다. 따라서 그는 온갖 이야기를 주워듣곤 했다. 즉, 치즈루가 제게 보이는 온갖 웃음과 속살거림 뒤 행하는 잔혹한 손속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사담을 나불대는 놈은 없었으나 귀를 닫고 사는 하이타니라 하더라도 뚫린 귀인 이상에 듣게 되었다. 남자는 아주 오랜만에 이노우에에게 말을 걸었는데 자그마치 이주만이었다. 하이타니 (린쨩) : 이겼냐?
촉촉한 입술이 아주 조그맣게 벌어지고 하얀 손이 붉어진 뺨을 가렸다. 린도는 답을 듣기도 전에 흥미를 잃었지만, 형 되는 쪽은 사정이 다른지 자리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형과 몹시 친밀했으므로 자리를 뜨지 않고 답을 기다려주는 신세가 됐다. 치즈루는 그렇게 입술을 작게 벌리고 있다가 금세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겼다는 거군. 뒤에 있던 놈들이 해석하고 나섰으나 정작 치즈루는 별난 소리를 했다. 응, 언제나 좋아하니까!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니까. 내가 하이타니 씨를 가장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이길 수밖에 없는거야. 누가 더 사랑하는지 내기를 할 때마다 이기는걸!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가위바위보 같은 거로. 나는 브이를 내서 이겼어. 역시 브이는 승리의 브이인 걸까? 이건 역시 떠벌리기를 잘하는군. 이라고 하이타니가 질색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속엣말이다. 치즈루는 하이타니의 질리는 기색을 읽어냈지만, 거기에 미움은 없음을 재빠르게 탐색해낸다. 그렇다면 안심하고 브이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기에 좋은 피스를 만들어낸다. 얻어맞은 뺨을 미묘하게 가리는 피스는 앙증맞다.
하이타니 형제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뒤를 돈다. 물론 치즈루도 린도를 따른다. 그들이 어디론가 가봐야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사람에 치여 놓칠 일은 없다. 역시 린도는 상냥해! 치즈루는 좋을대로 생각하지만 양키들이야 다 그렇지 않은가.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습한 곳에 똬리를 튼다. 지루한 일보다 시끄러운 사건에 더 자주 휩싸이지만, 표정은 지루해 죽겠다는 심사를 내보인다. 린도는 치즈루로 인해 보통 양키들과는 아주 약간 다른 궤도를 달린다. 중요한 점은 결코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수천 번을 밀어대니 반 발자국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식이다. 치즈루는 오늘도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린도가 말을 먼저 걸어준 날이니 기념하고도 남았다. 치즈의 일기장에 하이타니 린도의 이름은 제 이름보다 배는 많이 적혀 있다. 사랑은 절대 해롭지 않은 것이니까! 치즈루가 까르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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