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즐기는 취미 따위 없다. 돌연 해풍이 얼굴을 급습해 이노우에는 질끈 눈을 감았다. 올려 묶은 머리칼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감각. 가만둘까 고민하는 찰나 제가 누구 뒤에 서 있는지 떠올려 낸다. 무릇 여자아이라면 어느 순간이든 사랑스러워야 하지 않겠어. 의식적으로 생각하며 손을 옮긴다. 찡그린 표정을 고친다. 여태 학습한 것들 사이서 가장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골라냈다. 이노우에가 바라는 건 두 개. 하나, 하이타니가 나를 봐 주고 있기를. 둘, 제 꼴이 흉하지 않기를.
머리칼 흔들리던 것이 멈춘다. 이노우에는 번쩍 눈을 떴다. 검은 옷차림의 남자, 나의 하이타니……의 뒷모습. 천축天竺의 특공복은 붉은색이건만 하이타니의 특공복은 검다. 허리에 띠도 두른 채다. 등에 새긴 음양 무늬, 유려한 서체의 한자. 늠름한 자태에 무심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 아닌 식도를 두들겨 댄다. 익숙하고 낯설어. 늘 그랬듯 온몸이 전율한다. 오늘만 꼬박 일곱 번째, 사랑에 빠지는 중이다.
운명은 형체를 가지는가?
이노우에는 그렇다고 믿는 편이다. 아니, 정정, 그렇다고 믿게 됐다. 하이타니 린도가 이노우에 치즈루의 뺨에 상처를 내던 때, 벼락처럼 내리친 사랑이 따끔해 어찌나 몸이 떨리던지. 백설조차 흠모할 것이 분명한 붉은 피에 비린 맛 없던 것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눈치 없이 새살 돋으려 하는 게 짜증 나 손톱을 세웠더니 금세 흉이 졌다. 의사가 말하길 이걸 없애려면 칼을 대야 한다더라. 그 말 듣고 눈물이 났다. 기뻐서.
예수는 피 흘려 사랑을 증거했다. 예수가 피 흘린 까닭은 인간, 예수가 사랑한 것도 인간. 오, 여호와여. 당신의 뜻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 숭고하고 깊은 뜻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피부를 들어내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인류사에 수술이란 개념이 생긴 지 얼마나 되었더라. 의사는 퍽 걱정스런 얼굴하고서 여자 얼굴에 흉이 남는 건 보기 흉하지 않겠느냐 물었다. 미친 돼지 같으니. 인위적인 것은 순결하지 못하다. 신이 어디 기계를 빚었던가.
하이타니를 만나 이야기 들려주었다. 당신에게서 사랑을 받았노라 고백할 때는 지나치게 떨리고 설레어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발음했다. 부디 네 이름 네 글자 灰谷竜胆 가 귀해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하는 나를 눈치채 주어. 애석하게도 부끄럼이 많은 듯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운명은 형체를 띤다. 하이타니가 이노우에의 몸에 새긴 것. 이미 받아버린 것을, 하물며 보이기조차 하는 것을 부정하는 건 셀 수 있는 어리석음인지.
질문을 바꾸어야겠다. 이노우에는 손을 들어 꼼꼼히 땋은 머리칼을 잡는다. 반만 푸르다. 머리칼을 땋은 이유는 순전 그의 형제 때문이다. 양 갈래로 땋아 돌아다니는 것 가만 지켜보니 움직일 때 팔락거리는 꼴이 의외로 신경 쓰여 따라 땋았다. 한 번 눈여겨보기라도 할까 봐.
언젠가 그 아름다운 보랏빛 눈으로 나를 담아 준다면……. 눈 감아 망상한다. 장갑에 가려진 고운 손으로 내 머리칼을 더듬다 당신을 생각하며 땋아낸 가닥으로 이어지는 것. 엄지로 뺨의 사랑을 어루만지는 것. 사내다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는 것. 신성 앞에 사랑을 맹세하는 것.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다. 안 봐도 안다, 뺨이 붉겠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니 가만두기로 한다. 어쩌면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줄지도 몰라.
사랑은 어떠한 형체를 가지는가?
모래알 사박거리는 소릴 듣는다. 이노우에는 언제나 머리보단 발이 빠르다. 천축 글자 새겨진 음양 무늬에 온 세상 잡아먹으라 내줬다. 팔이 움직이는 원리는 무언지. 단단한 육체에 볼을 맞대고 가슴을 가만 끌어안았다. 호흡하니 그의 살내가 난다.
…….
……아까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잊어버렸다.